한때 국도변에는 가족 단위 피서객과 관광버스를 가득 실은 여행객들로 북적이던 작은 마을들이 있었습니다.
국도 3호선, 5호선, 7번 국도 같은 주요 도로를 따라 형성된 휴게소형 관광지는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지역 경제를 떠받치는 중심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고속도로의 확장과 내비게이션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제 많은 마을들은 ‘지나는 길’에서 ‘지나치게 되는 길’이 되었고, 그와 함께 마을의 명소들도 하나둘 잊혀지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고속도로 개통 이후 버려진 국도변 유휴 관광지의 현실과 그 속에 담긴 지역의 역사, 애환, 그리고 재생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국도가 관광을 만들었던 시절
① 국도변 마을, 여행길의 쉼표였던 곳들
고속도로가 본격적으로 전국망을 갖추기 전, 국도는 여행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길이었습니다.
특히 국도 옆에 위치한 마을이나 소도시는 그 위치만으로도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었고,
휴게소, 재래시장, 민박촌, 족욕탕, 특산물 판매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주변, 전남 구례의 국도 19호선변 관광지,
강원 인제의 국도 44호선변 마을 등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국도 드라이브 명소로 꼽혔습니다.
② 관광버스와 함께한 ‘국도 시대’의 전성기
당시에는 여행이라 하면 관광버스 단체 여행이 기본이었고,
그 버스들은 반드시 중간 중간 국도변 식당이나 마을휴게소에 들러 식사를 하거나 구경을 했습니다.
덕분에 한 마을의 청국장집이나 더덕구이 식당이 전국적 명소가 되기도 했고,
여행자의 입소문만으로 몇 시간 줄을 서야 했던 유원지도 적지 않았습니다.
국도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와 특산품, 사람의 온기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③ 지역 경제를 떠받친 국도변 관광지
이런 구조는 해당 마을의 경제 구조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말마다 관광객을 상대하는 상점과 숙박업체가 생겨났고, 농산물 직판장과 체험학습장이 자리 잡으면서 지역 일자리가 창출되었습니다.
특히 1차 산업에 의존하던 마을에 관광은 새로운 수입원이었고,
어르신들도 마을 해설사나 공예체험 강사로 활동하며 ‘노년의 직업’을 갖게 되기도 했습니다.
고속도로가 지나간 뒤, 그 마을에 남은 것
① 길이 바뀌자 사라진 발길
하지만 고속도로가 뚫리고, 내비게이션과 길찾기 앱이 보편화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차량들은 더 빠르고 효율적인 길을 따라 이동하게 되었고, 국도는 점차 ‘우회로’로 전락했습니다.
더 이상 국도변 마을에 들를 이유가 없어진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그 마을들의 경제도 함께 주저앉기 시작했습니다.
② 쓸쓸하게 방치된 유휴 공간들
국도변에 있던 관광지는 빠르게 폐허화되었습니다.
한때 사람들로 북적이던 족욕탕은 낡은 간판만 남아 있고, 전통 공예마을은 체험 장비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습니다.
식당과 민박은 영업을 접고 문을 닫았으며, 한때 ‘포토존’이었던 조형물은 낙엽에 가려져 사라져가는 중입니다.
이러한 장소들은 현재 ‘지도에는 있으나 실제론 닫혀 있는 곳’으로 남아,
드라이브 중 우연히 마주친 여행자들에게 묘한 정적과 슬픔을 안겨줍니다.
③ 관광에서 소외된 마을 주민들
관광지가 사라지면 그 여파는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돌아옵니다.
단순한 상권 침체를 넘어서 일자리 상실, 마을 공동체의 해체, 청년층 유출로 이어지는 것이죠.
특히 관광객 중심으로 재편됐던 마을 경제 구조는 중장년층 이상에게 더욱 큰 타격을 주었고,
지역 소멸 위험 지역으로 지정되는 곳도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관광산업이 일시적인 붐에 의존했기에, 변화에 취약했던 것입니다.
다시 주목받을 수 있을까: 국도 옆 유휴 공간의 가능성
① 슬로우 여행의 시대, 국도의 재발견
최근 들어 여행의 방식이 다시 변화하고 있습니다.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머물고 걷고 맛보는 여행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국도변 마을들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국도 여행 코스’나 ‘오래된 국도 카페’, ‘국도 따라가는 향토시장 투어’ 등 개인 여행자들이 스스로 루트를 짜는 콘텐츠가 증가하며
이전의 국도 마을들이 조용한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② 마을과 콘텐츠를 연결하는 새로운 시도
경북 봉화는 한때 관광버스가 줄지어 들어오던 국도변 마을이었으나,
최근에는 한적한 국도길을 따라 자전거 여행 코스를 조성하며 ‘느린 여행’에 어울리는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전북 무주의 국도변에서는 마을 장터와 함께하는 전통주 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충남 청양의 국도길 인근 폐창고는 지역 예술가들의 갤러리로 재활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휴 공간을 창의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사례들이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③ 정책적 지원과 주민 주도의 관광 모델 필요
유휴 관광지를 재생하기 위해서는 외부 지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을 주민 스스로의 참여와 주도성입니다.
관광은 결국 ‘사람’이 만드는 것이기에, 주민이 운영하는 카페, 주민이 들려주는 이야기, 주민이 생산한 농산물과 상품이
공간의 매력을 결정짓습니다. 또한 지자체의 장기적인 지원, 국도변 문화 자산의 발굴, 지역 대학이나 청년 창업가와의 협업도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고속도로는 빠르고 편리한 길을 열었지만, 그 과정에서 잊혀진 길과 마을, 그리고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국도변 유휴 관광지는 사라진 공간이 아니라, 조금은 천천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소일지 모릅니다.
지금,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 길 하나만 따라가도 그 속에는 여전히 이야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소소한 매력이 있는 국도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