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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삶을 팔던 골목: 문을 닫은 전통 5일장의 마지막 흔적

by 김제빵 2025. 4. 19.

 한때는 ‘장날’이 곧 ‘동네의 축제일’이었습니다. 달력보다 장날을 먼저 기억하고, 사람보다 물건보다 먼저 그 시끌벅적한 소리를 떠올리던 시절. 하지만 지금, 전국 곳곳에서 5일장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제가 살았던 지역도 5일장이 열리곤 하나, 예전보다 조용함이 물씬 느껴지는 안타까움에..

 오늘 글에서는 전통 5일장이 걸어온 역사와 현재, 그리고 문을 닫은 장터의 풍경과 그 의미를 되짚어보려 합니다.

 

시장에서 삶을 팔던 골목: 문을 닫은 전통 5일장의 마지막 흔적
시장에서 삶을 팔던 골목: 문을 닫은 전통 5일장의 마지막 흔적

5일장, 한국의 삶을 담았던 장터

① 자연스럽게 시작된 민속 경제
 5일장은 이름 그대로 5일마다 한 번씩 열리는 장터입니다. 조선 후기부터 농촌과 산간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 장터는, 지역 경제의 핵심이자 교류의 장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채소, 생선, 곡물 같은 생활필수품부터 의복, 농기구, 약초, 생활도구까지 모두 거래되었고, 때로는 예술공연과 점술, 놀이판이 함께 하며 ‘시장’ 그 이상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② 물건보다 사람이 중심이었던 곳
 5일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자리가 아니라, 삶을 나누고 이야기를 전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단골과 상인의 관계는 오랜 신뢰를 바탕으로 이어졌고, 시장에서 마주친 이웃과 한담을 나누며 지역사회는 유대감을 쌓아갔습니다. 음식을 사고 덤으로 정을 얻고, 생필품을 구하며 소식을 주고받는 이 시장은 말 그대로 '서민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③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장날의 풍경
 1970~80년대만 해도 전국 대부분의 읍·면 지역에는 고유의 5일장이 있었습니다. 장터가 들어서면 외지에서 물건을 들고 온 장돌뱅이들이 모였고, 동네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함께 북적였습니다. 하지만 도시화와 유통 산업의 발달로 인해, 1990년대 이후부터는 그 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문을 닫은 5일장, 남겨진 흔적들

 ① 유통 구조 변화와 장터의 위기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의 확산

 5일장의 존립 기반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가격, 상품의 다양성, 접근성 등에서 밀릴 수밖에 없는 전통 시장은 점차 손님들의 발길을 잃어갔고, 결국 자연스럽게 장이 열리지 않게 된 곳이 속출했습니다. 특히 교통이 불편한 농촌지역에서는 장터가 문을 닫는 일이 일상처럼 되었습니다.

 

② 사라져간 장터의 사례들
경북 봉화의 명호장, 충남 금산의 복수장, 전남 고흥의 금산장 등은 모두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던 5일장이었지만, 최근 10년 사이 문을 닫거나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일부 장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장사 수요가 급감하면서 완전히 종료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단지 장이 닫힌 것이 아니라, 지역의 정서적 중심이 사라진 것과도 같습니다.

 

③ 흩어진 상인, 끊긴 관계
 장이 닫히면 상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단골손님과의 관계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습니다. 일부 상인들은 새로운 장터로 옮겨가지만, 이동이 어려운 고령 상인들은 장사 자체를 그만두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생계 수단의 종료가 아닌, 인생의 마지막 무대를 잃는 일이기도 합니다. 장터는 곧 삶의 자리였고, ‘장날’은 이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보존하는 방식, 새로운 5일장의 가능성

①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지는 문화
ㅠ지금까지 수많은 장터가 아무 기록 없이 사라졌습니다. 구술사나 지역 아카이빙을 통해 장날의 기억을 보존하는 시도가 중요합니다. 실제로 전북 진안군이나 강원도 정선군 등에서는 장날의 풍경을 사진과 영상으로 남기고, 생존 상인들의 인터뷰를 통해 기억을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이 작업은 단지 과거를 아카이빙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이 가진 정서와 공동체 정신을 함께 되살리는 일입니다.

 

② 새로운 소비 문화와 연결한 재생 시도
 일부 지역에서는 5일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로컬 마켓’, ‘레트로 장터’ 등으로 새롭게 기획해 젊은 세대와 관광객을 끌어들이려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전남 곡성에서는 기존 장터를 ‘레트로 5일장’으로 꾸며 지역 농산물과 수공예품을 판매하고, 공연과 체험 부스를 함께 운영해 새로운 소비 경험을 제공합니다. 이처럼 장터도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③ 시장을 ‘살아 있는 공간’으로 남기기
 5일장은 그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숨 쉬는 공간입니다.

 다만 지금의 흐름에 맞는 방식으로 재정비되고, 지역 주민이 중심이 되는 지속 가능한 구조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관 주도의 일시적 이벤트가 아니라, 장날이 다시 지역민의 생활 리듬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장기적인 계획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시장의 빈자리를 메우는 새로운 실험들

① 5일장의 흔적 위에 놓이는 ‘도시형 마켓’
 전통 5일장이 문을 닫은 자리는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임시 주차장, 공터, 혹은 다른 용도로 전환됩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이 빈 공간을 다시 사람들로 채우기 위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폐장된 장터 터를 활용해 청년 창업 플리마켓이나 로컬 푸드 마켓을 여는 사례들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어, 강원도 홍천군은 폐쇄된 5일장 터를 활용해 월 1회 ‘주말 문화장터’를 운영하며 지역 예술가와 소상공인의 제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시도는 시장의 전통성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라는 본질을 살리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② ‘시장’이 아니라도 이어지는 장의 문화
 흥미로운 것은, 전통 5일장이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장이 서는 날’을 기다린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지 물건을 사기 위함이 아니라, 장날이라는 주기적 리듬이 일상 속에서 주는 활력과 기대감 때문입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과거 장터의 운영일에 맞춰 작은 골목 장터나 푸드트럭 이벤트를 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방식은 현대적인 형태로 바뀌었을지라도, 지역의 고유한 시간 흐름과 정서를 존중하려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③ 지역민이 기억하는 마지막 장날
 문을 닫기 직전의 5일장에 남은 풍경은 종종 지역민들의 이야기 속에서 전해집니다.

 “마지막 장날엔 평소보다 더 많은 이들이 몰려와 일부러 된장 한 말, 고추 한 되라도 더 사갔어요. 마치 마지막 인사처럼.”
 이처럼, 장터는 단순한 거래의 공간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정이 오고가는 곳이었습니다. 마지막 장날에 울컥했던 상인, 그날을 사진으로 남긴 주민들, 장터가 철거된 뒤에도 매년 그 자리를 찾아오는 사람들. 이들의 존재는 시장이라는 공간이 단지 ‘살 곳’이 아닌, ‘삶이 있었던 곳’임을 말해줍니다.

 

④ 문을 닫은 시장에 필요한 것은 기억과 존중
 모든 전통 시장을 되살릴 수는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 소비 방식의 변화, 인구 구조의 전환은 장터의 쇠퇴를 피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장들이 사라지는 과정을 기록하고,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을 존중하는 태도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시장을 거쳐간 수많은 장사꾼들과 주민들의 시간을 하나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문화적 보존입니다.

 

 

 5일장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지 장터 하나가 문을 닫은 게 아닙니다. 그곳을 찾던 사람들, 그 골목을 살아내던 상인들, 삶을 팔고 정을 나누던 수많은 이야기가 함께 묻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잊히는 공간을 향한 관심이 결국 우리의 삶을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저도 이번에 고향을 방문하면 5일장에 갈 예정입니다. 여러분도 오늘날 도시 어귀의 한적한 공터를 지나칠 때,

 한 번쯤 떠올려 봅니다. 그곳, 한때는 시장이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