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지역의 새로운 관광 자원으로 주목받았던 근현대 유적지들이,
이제는 덩그러니 남아 잡초와 녹슨 철문 속에 방치되어 있습니다.
'관광지로 개발되다 중단된 근현대 유산'에 초점을 맞춰,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어떤 장소들이 현재 그런 운명에 놓여 있는지가 궁금해서 오늘 글을 작성해 보려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특히 그중에서도낡았지만 가치 있는 공간들, 그 사이에 놓인 우리 사회의 기억과 과제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개발에 실패한 근현대 유산, 어디서부터 어긋났나
1. 지자체 주도의 단기성 개발 전략
많은 근현대 유적지들은 2000년대 중후반부터 지방자치단체가 중심이 되어 ‘문화재+관광’이라는 방식으로 재개발에 착수했습니다. 특히 일제강점기 유적지나 산업화 시기의 공장, 철도 시설, 병원 등은 도시 재생의 아이콘처럼 활용되었죠. 하지만 상당수는 명확한 수요 분석 없이 추진되거나, 단기적인 이벤트 중심으로만 운영되어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2. 예산 투입 이후 관리 부재로 방치
일부 유적지는 외관 복원이나 관광 안내소 건립 등으로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이후 관리 주체가 모호해지면서 사실상 방치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예를 들어, 철도 관련 유적지나 군사 시설은 특정 부처의 예산만으로는 유지·보수가 어렵고, 민간 운영 유치도 쉽지 않아 폐허처럼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정체성 혼란과 콘텐츠 부족
근현대 유산은 전통 문화재에 비해 '역사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낮고, 때로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일제강점기 경찰서나 탄광촌 유적은 그 자체가 과거의 상처를 담고 있기에, 어떤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야 할지 혼란이 따릅니다. 이로 인해 현장에는 콘텐츠가 거의 없는 빈 건물만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멈춘 시간 속에 남아 있는 공간들
1. 인천 송도유원지 옛터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수도권 대표 유원지로 이름을 날렸던 인천 송도유원지는, 한때 레트로 감성의 관광지로 복원 시도가 있었지만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중단됐습니다. 현재 일부 조형물만 남아 있고, 주변은 아파트 개발로 둘러싸여 점점 흔적이 지워지고 있습니다.
2. 경북 문경의 탄광촌 유적
문경 지역은 석탄 산업의 중심지였고, 탄광이 폐광되면서 그 흔적을 관광자원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광산 체험관’ 등이 만들어졌지만, 수요 부족과 안전 문제로 대부분 철거 혹은 폐쇄되었습니다. 일부 폐광 마을은 현재 관광 안내 표지만 남은 채 사람의 발길이 끊긴 상태입니다.
3. 전북 군산의 일본식 적산가옥 거리
군산은 일제강점기의 건축물들이 비교적 잘 보존된 지역이지만, 이곳 또한 상업화와 보존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적산가옥 거리는 2010년대 중반부터 '레트로 거리'로 조명됐지만, 상권 형성이 어렵고, 일부는 관광객 감소로 폐업하거나 재개발 논의가 오가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남겨진 유산과 지역, 그리고 우리가 할 일
1. 역사를 둘러싼 균형 잡힌 시선 필요
근현대 유산은 조선 시대 궁궐이나 불교 사찰처럼 전통적 아름다움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전쟁과 식민, 산업화의 어두운 면을 담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를 ‘치워야 할 흉물’이 아닌, ‘기억의 매개체’로 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눈으로 보기엔 불편할 수 있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2. 관광지 이전에 ‘기록의 공간’으로 전환해야
이제는 모든 유산을 무조건 관광 자원으로 만들기보다는, 기록과 교육의 공간으로 기능하게 만드는 전환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폐허가 된 철도역에 VR 체험이나 전시 콘텐츠를 더해 역사적 맥락을 전달하는 방식, 혹은 과거 산업 시설을 리서치 기반의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등 목적성 있는 접근이 요구됩니다.
3. 지역 사회와의 협력, 그리고 지속성 확보
유산의 보존과 재활용은 단지 전문가나 행정기관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역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고, 운영까지 함께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실질적인 생명력을 갖습니다. 일회성 사업이 아닌,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획과 운영을 이어가는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방치된 유산이 다시 이야기의 공간으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유산이 아닌 ‘부담’으로 남은 공간들문화재가 아닌 개발 대상으로 인식된 유산
많은 근현대 유적은 국가 지정 문화재가 아닌 ‘등록문화재’ 혹은 ‘비지정 건축물’로 분류되어, 개발 시 특별한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특히 공장, 병원, 철도 시설 등은 역사적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노후된 건물' 혹은 '활용이 어려운 부지'로 여겨졌습니다. 이로 인해 지자체나 민간은 보존보다는 철거 또는 상업적 재개발에 더 초점을 맞춰왔습니다.
결과적으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공간들이 관광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철거되거나,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 중단된 사업의 그림자, 법적 공백 속 유산
개발이 중단된 유산들은 법적으로도 방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산이 끊기고 사업 주체가 사라지면, 해당 유적은 관리 주체조차 없는 '애매한 부지'가 됩니다. 예를 들어, 2010년대 초 경기도 내에 있던 한 일제강점기 철도 관사는 복원 프로젝트가 중단되면서 이후 수년간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공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건물은 점점 훼손되었고, 지역 주민들은 오히려 위험 요소로 인식하게 되면서 철거를 요구하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 보존과 개발 사이, 시민사회의 개입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에는 시민단체와 지역 커뮤니티가 주도하는 유산 보존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부산의 구 일본영사관, 대구의 산업유산인 제지공장 등은 민간 주도 하에 문화 행사나 지역 축제를 통해 공간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공간을 단지 ‘보존해야 할 유물’이 아닌, 살아 있는 지역 자산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역시 지속적인 운영을 위한 행정적 지원과 예산이 부족하면 일회성에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 ‘방치된 유산’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한 이유
근현대 유산이 '관광지로서 실패한 공간'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장소라는 인식 전환이 중요합니다.
일제강점기부터 산업화 시대까지의 흔적을 담고 있는 건축물이나 공간은, 현대사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는 ‘시간의 기록’입니다. 화려한 테마파크나 대형 리조트로 재탄생하지 않더라도, 그 공간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현재의 관점에서 풀어내는 작업은 향후 유산 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던 공간들이 사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라짐조차 기록되지 않고, 이유 없이 잊힌다면 우리는 결국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관광지로 만들려다 실패한 근현대 유산은 ‘실패한 사업’이 아니라, ‘잊혀진 기억’이자 ‘남겨야 할 과제’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방치된 공간들을 다시 바라보아야 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관광지로 재현하지 않아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요소임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되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