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부, 특히 랑그도크와 루시용 지방은 오랜 와인 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햇볕이 잘 드는 언덕과 석회질 토양, 지중해 바람이 어우러진 이곳은 수백 년간 소규모 와이너리와 전통 양조 마을의 기반이 되어 왔죠.
하지만 산업화, 농업 정책 변화, 그리고 잘못된 관광 개발 시도가 겹치면서 지금은 ‘유령 와인 마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버려진 마을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한때 와인과 햇살, 그리고 꿈으로 가득했던 마을들이 왜 잊히고 버려졌는지, 그 흔적을 따라가보고자 합니다.
와인산업과 함께 번영했던 마을, 그리고 첫 번째 쇠퇴
① 랑그도크의 와인 붐과 소규모 생산지의 전성기
20세기 초, 랑그도크 지방은 프랑스 최대의 와인 생산지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농업 협동조합이 중심이 되어 지역 단위로 와인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구조가 정착되면서, 작은 마을들도 자립적인 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죠. 마을 중심에는 와인 저장고가 자리잡고 있었고, 수확철이 되면 모든 주민이 수확과 양조에 참여했습니다.
② 유럽연합 농업 정책과 세계 와인 시장의 변화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프랑스 와인 산업은 전환기를 맞습니다. 유럽연합의 농업 보조금 정책 변경과 함께, 경쟁력이 낮은 저가 와인의 생산 축소가 권고되었고, 동시에 신세계 와인(호주, 칠레, 미국 등)의 부상으로 프랑스 와인의 입지가 흔들렸습니다.
특히 랑그도크처럼 대량 생산 중심이던 지역은 타격이 컸고, 많은 마을이 주요 수입원인 와인 생산을 줄이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농가 인구가 감소하고, 폐허가 된 저장소와 포도밭이 남겨졌습니다.
③ 잊힌 마을을 살리기 위한 첫 시도, 관광지 개발
1990년대 중반, 일부 마을에서는 관광지 개발로 재도약을 시도합니다. 지역 정부와 개발업자들이 협력하여 ‘와인 테마 관광지’, 즉 와인 시음장, 역사 박물관, 고성 개조 숙박업 등으로의 전환을 꾀한 것이죠.
대표적인 사례로는 미네르부아 지방의 몇몇 마을들이 있으며, 낡은 양조장을 리모델링하여 갤러리나 호텔로 바꾸고, 지역 와이너리와 연계한 투어 상품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 중 상당수는 관광 수요 예측 실패와 인프라 부족, 지속 가능성 부족 등의 이유로 장기적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유령 와인 마을’이 된 이유: 관광 개발의 명암
① 잘못된 수요 예측과 철저하지 못한 계획
유령 마을이 된 마을들의 공통점은 ‘관광 수요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낙관적으로 개발했다’는 점입니다. 일부 마을은 외국인 투자자에 의해 와이너리와 숙소가 대거 들어섰지만, 정작 방문객은 몇 주 동안 한 명도 찾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비성수기 운영 모델 부족, 현지 교통망 미정비, 지역 사회와의 소통 부재 등은 마을 전체를 빈껍데기로 만들었고, 결국 일부 와이너리는 파산하고, 관광 시설은 문을 닫으며 폐허가 되었습니다.
② 주민의 이탈과 공동체 해체
와인 산업이 무너지며 먼저 이탈한 것은 청년층이었습니다. 와인을 물려받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는 도시로 떠났고, 남은 주민들 대부분은 고령자였습니다. 이후 관광 사업마저 실패하자 마을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마트도 학교도 문을 닫았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이들 마을에 대해 일부 건물에 철거 경고를 내리거나, ‘문화재 보호 지역’으로 묶어 관리하고 있지만, 정작 실질적인 재생을 위한 투자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폐허가 된 숙소, 붕괴된 창고, 마을 어귀에 써진 (매물 중인 샤토)의 간판만이 남아 있습니다.
③ 와인과 예술, 관광의 어색한 결합
예술 관광과 와인을 결합한 개발도 시도되었습니다. 낡은 와인 창고에 현대미술을 전시하거나, 포도밭에 설치미술을 놓는 식이죠. 그러나 이는 오히려 관광객의 이해와 감성을 따르지 못하고, 와인 생산지라는 본래 정체성을 흐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술’이라는 요소가 마을에 침투하기보다는, 외부 개발자에 의해 이식되는 방식이었고, 이는 지역 정체성 회복보다는 ‘마케팅용 스토리’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유령 마을에서 다시 보는 ‘관광의 지속성’과 다음을 위한 교훈
① 모든 마을이 관광지로 성공할 수는 없다
이 사례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줍니다. 모든 낡은 마을이 관광지로 재탄생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쁘다’거나 ‘스토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속적인 방문객을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교통, 접근성, 콘텐츠의 다양성, 지역 커뮤니티의 유지 등 복합적인 조건이 필요합니다.
프랑스의 몇몇 와인 마을은 오히려 ‘관광을 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며 조용히 일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방문객보다 거주민의 삶을 우선시하며, 자연스럽게 전통을 지켜나가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있죠.
② 잊힌 마을이 가진 진정한 가치
폐허처럼 보이는 유령 마을에도 여전히 이야기는 남아 있습니다. 수십 년 전 와인을 숙성시키던 돌 저장고, 손으로 짜낸 와인을 담았던 오래된 오크통, 그리고 수확 후 축제를 벌이던 광장. 그 모든 것들은 ’상품’이 아닌 ‘기억의 장소’로서 의미를 지닙니다.
프랑스 남부의 몇몇 단체는 이러한 유령 마을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구술 인터뷰, 사진 아카이빙, 옛 와인 라벨 수집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즉, ‘보존을 통한 관광’이 아니라 ‘기억을 통한 의미 부여’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죠.
③ 관광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프랑스 유령 와인 마을의 사례는 관광이 마을을 살릴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관광은 지역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해야 하며, 지역의 리듬과 구조에 기반하지 않으면 쉽게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포도향이 마을 전체를 감쌌던 프랑스 남부의 와인 마을들. 그곳은 지금 폐허가 되어 있지만,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장소입니다.
관광지로서의 성공 여부가 아닌, 지역의 기억과 문화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그 궤적을 되돌아보는 일은 지금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당장은 찾는 이가 없어도, 진짜 매력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유령 와인 마을은 그 조용한 증인이 되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