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럽과 오스만, 슬라브 문화가 어우러진 교차점이었던 발칸 반도. 이곳은 문화적 다양성과 함께 수많은 전쟁과 분열의 흔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해체와 함께 일어난 발칸 전쟁은 수많은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고, 전후 복구의 불균형은 ‘회복되지 못한 도시들’이라는 새로운 유산을 남겼습니다.
일부 도시는 관광지로 탈바꿈하며 새로운 명성을 얻었지만, 여전히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살아가는 도시들도 많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전쟁의 그림자가 걷히지 않은 채, 부흥의 기회를 놓친 발칸의 도시들, 그리고 그곳이 지금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사라예보와 비하치: ‘한때의 중심지’가 된 도시들
사라예보의 영광과 침묵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는 1984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이자, 유럽과 이슬람 문화가 만나는 상징적인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이어진 사라예보 포위전은 유럽 현대사 최악의 도시 포위전으로 기록되며 이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포위가 끝난 뒤에도 사라예보는 여전히 복구되지 않은 건물들과 전쟁 희생자의 무덤이 도시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구도심인 바슈차르시야(Baščaršija) 일대는 관광객으로 북적이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주거지역이 펼쳐지죠.
도시는 여전히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습니다. 전쟁 박물관과 총탄 자국이 남은 아파트가 공존하고, 관광 홍보 슬로건과는 달리 청년 인구의 대량 유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라예보는 회복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흥의 껍데기’ 속에 멈춰 선 도시입니다.
비하치: 국경의 도시, 잊힌 관문
보스니아 북서부의 작은 도시 비하치는 크로아티아 국경과 가까운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전쟁 이전에는 산업과 물류의 중심지로 성장 가능성이 높았지만, 전후 국가 간의 복잡한 정치 구조 속에서 인프라 확장이 멈춰버렸습니다.
현재 비하치는 난민과 이주민 경로의 통과 지점으로 더 자주 언급됩니다. 슬로베니아나 오스트리아로 향하려는 이주민들이 머무는 임시 거처가 도시 외곽에 생겨나면서, 관광보다 불안과 피로의 이미지가 더 크게 남아 있죠.
아름다운 우나 강과 자연 보호구역이 있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관광 인프라는 거의 없으며, 유럽연합 지원도 제한적으로만 이뤄지고 있습니다. 자연도, 역사도, 가능성도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작동하지 않는 도시, 비하치는 발칸 전후 복구의 상징적 실패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슬로우 시티 혹은 정체된 마을: 부흥 대신 멈춤을 택한 곳들
몬테네그로의 플라브와 거신의 호수
몬테네그로 북부의 플라브는 알바니아와 국경을 마주한 고산 지대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플라브 호수와 주변 알프스 산맥의 아름다움으로 잠재적 관광지로 주목을 받았지만, 여전히 방문객은 많지 않습니다. 도로 사정은 열악하고, 관광안내소조차 찾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플라브는 개발 대신 ‘시간을 멈추는 방식’의 선택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전쟁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중앙정부의 관심과 투자가 거의 닿지 않아 의도하지 않은 슬로우 시티로 남아 있는 셈이죠. 지역 주민들은 농업과 양식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관광 대신 ‘살아가는 삶’을 우선시합니다.
세르비아 남부: 철도 따라 사라진 도시들
세르비아 남부의 구 철도 노선을 따라 펼쳐진 작은 도시들, 예를 들어 니시에서 프레셰보로 이어지는 구간은 한때 유고 연방 시절 산업과 물류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이후 철도 노선이 단절되고 주요 산업시설이 폐쇄되면서, 이 일대 도시는 빠르게 쇠락했습니다.
국가 차원의 관광 개발 정책은 주로 베오그라드나 드라이나 계곡처럼 상징적 지역에 집중되고, 이런 남부 소도시는 대부분 ‘유령도시화’를 겪고 있습니다. 철도역은 폐쇄되었고, 역 앞 광장은 더 이상 활기를 띠지 않습니다.
이곳의 주민들은 출근길 대신 마을 광장에서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고, 청년들은 이미 대도시나 유럽 외 국가로 이주했습니다. 도시는 살아있지만, 기능은 정지된 채, 한 시절을 품고 있습니다.
왜 이 도시는 되살아나지 못했을까? 복구의 사각지대
유럽연합의 외면, 또는 불균형한 지원
발칸 전후 복구에서 가장 자주 지적되는 문제 중 하나는 EU 중심의 불균형한 개발 지원입니다.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는 EU 가입 이후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받으며 관광지로 탈바꿈했지만, 보스니아, 세르비아, 코소보, 몬테네그로는 여전히 정치적·외교적 이유로 지원에서 소외된 경우가 많습니다.
도시 단위로 내려오는 재정 지원이 불충분한 데다, 복잡한 행정 구조로 인해 현지 주민 주도의 재생 프로젝트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 도시들은 아예 복구를 포기하고, 과거를 박물관처럼 유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기도 합니다.
전쟁의 기억을 팔지 않으려는 도시들
일부 도시에서는 전쟁 피해를 관광화하지 않겠다는 지역 사회의 결정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보스니아의 고라즈데는 사라예보처럼 포위되었지만, 전쟁 박물관이나 투어 상품 없이 조용히 전쟁의 기억을 간직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관광 상품으로 적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억의 윤리에 대한 고민과 공동체의 태도 차이 때문입니다. 고요하고 조용한 도시의 표면 아래에는, 아직 끝나지 않은 감정과 정치적 갈등이 흐르고 있죠. 이 도시들은 의도적으로 ‘슬로우’를 택했기보다는, 속도를 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고 있는 셈입니다.
발칸의 ‘슬로우 시티’들은 단순히 낙후되었거나 실패한 관광지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곳은 부흥의 기회를 잃은 것이 아니라, 그 기회를 감당할 수 없었던 구조 속에 놓인 도시들입니다. 도시 재생과 관광 개발이 곧 생존으로 직결되는 지역도 있지만, 반대로 무분별한 개발 대신 ‘정체된 삶’을 유지하며 존재의 의미를 지키는 도시도 존재합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흔적은 여전히 도시의 리듬과 구조를 지배합니다. 여행자는 그 속에서 무너진 것과 남겨진 것, 그리고 다시 피어나지 못한 것들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발칸의 이 조용한 도시들은 오늘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기만의 시간을 살고 있는 거 같네요.